물은 이제 금방 깊은 땅속에서 나와 큰물을 향해 흘러가고 있었다. 물은 흐르는 동안 다른 물들과 만나면서 점점 커지고 보다 힘찬 모습으로 커갔다. 시냇물이 개울의 조약돌들과 부딪히면서 부르는 노랫소리도 더욱 미묘해지고 아름다워졌다.
울은 시냇가 주변에 머물렀다. 울은 늘 머물기를 좋아했고 머물러 있어야만 했다. 울은 구슬같은 여울물 소리가 부러웠다. 햇빛을 받고 더욱 찬란한 빛을 반사하는 맑은 물이 늘 부럽기만 했다. 울은 오래전부터 거기에 그렇게 머물고 있었으므로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모르지만 겉모습은 나이 많은 노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울이 물에게 함께 머물러 있자고 했다. 물은 대답한다. “할머니, 저는 물이기 때문에 할머니와 함께 머물 수 없어요. 빨리 흘러가서 큰물을 만나야 하거든요.” 물은 울의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맑은 노래를 부르며 눈부시도록 찬란한 빛을 반사하며 춤추듯 흘러간다. 자신을 비웃듯 그렇게 흘러가고 있는 물을 보면서 울은 심술이 났다.
울은 물이 흐르는 것보다 빨리 달려서 앞질러 갔다. 물은 상관없다는 듯 여전히 노래를 부르며 흘러갔다. 얼마가지 않아서 물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자신의 몸이 더 이상 흐르지 않고 멈추어있는 것이다. 자신보다 앞서 달려갔던 울이 울타리를 단단하게 만들어 물이 흐르지 못하도록 막아 놓은 것이다.
물은 소리쳤다. “할머니, 왜 이러세요. 물은 이렇게 멈추어 있으면 썩어요, 빨리 이 울타리를 풀어주세요.“ 그러나 울은 팔짱을 끼고 재미있는 듯 쳐다본다. “너 왜 날 무시했어” “내가 언제 할머니를 무시했어요?” “내가 말하고 있는데 너는 말을 듣지도 않고 계속 흘러왔잖아...” “아니, 물이 흘러가는 것이 당연하지... 물이 흘러가는 것을 무시했다고 하면 억지지요... 빨이 이 울타리나 풀어주세요...“ 물은 애가 타서 소리친다.
“천만에 이 울타리는 절대로 풀어지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이 울타리에 마법을 걸어두었는데... 그 마법은 오직 너만이 풀 수 있다...“ 이상한 말을 남겨두고 울은 어디론가 떠나버리고 말았다.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면서 물이의 몸은 점점 푸른색을 띠면서 변해갔다. 이끼가 끼고 병균이 늘어나면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 수록 점점 흉측한 모습으로 변해갔다. 물의 마음은 온통 원망으로 가득찼다. “도데체 내가 뭘 잘못했길래 나에게 이러는 거야. 정말 못된 할망구야..“ 물이의 몸처럼 마음도 점점 흉측하게 변해갔다. 물은 몸으로 마구 울타리를 부딛혀 열어 보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울타리는 더욱 견고해지기만 했다.
며칠 사이에 물의 몸은 진한 녹색으로 변하고 썩은 물냄새는 물을 마시러 오는 모든 동물들을 쫒아내고 물은 외롭게 말라가고 있었다. 이제는 울타리에 부디칠 힘도 없고 완전히 말라 바닥이 보이기 시작하고 최후가 가까이 오는 듯 했다.
물은 깊은 생각에 잠긴다. 내가 왜 울을 화나게 했을까. 평생을 한 곳에 머물러 여행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한 울 할머니. 어떻게 생각하면 참 불쌍한 할머니다. 평생 시냇가에 머물러 흘러가는 생명가득한 물들을 바라보면서 머물러 있는 자신은 흉측한 노파의 모습으로 변해가면서 새로 시작하는 아름다운 물들을 계속 지켜봐야 한다는 것은 큰 슬픔이요 절망이었을 것이다.
...
물은 점점 울을 이해하게 되고, 동정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었다. 물이 마음 깊이 울을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자 너무나도 단단하게 묶여 있었던 울타리가 힘없이 풀어지면서 물은 다시 힘차게 쏟아져 흐르기 시작했다. 사랑의 마음이 자신을 묶고 있는 울타리를 푸는 열쇠였던 것이다. 그 열쇠는 물 자신이 갖고 있었다.
0 Comments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