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8:31-39
 

"할머니의 수첩에는 '마이클이 오늘 134번째 홈으로 들어왔다'는 기록이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제가 유치원 시절부터 야구시합을 하는 날은 하루도 빠짐없이 웅원하러 나오셨고, 야구 경기규칙은 전혀 아는 바가 없었지만 손자가 홈으로 뛰어들어오는 순간 만은 빠짐없이 기록하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보다 큰 목소리로, 누구보다 큰 몸 짓으로 좋아하셨습니다' 어느 젊은 목사님이 할머니를 기억하면서 말해준 내용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그렇답니다. 자신의 자녀들을 키울 때는 원칙만 내세우던 부모였는데, 손자손녀에게는 무원칙, 무조건이 가능합니다. 무조건 자기 편이 되어 주는 사람 품에서 아기는 어떤 걱정이 있을까요.

남루하게 입은 한 아이가 골목에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있습니다. 이것을 발견한 사람이 아이를 구해 병원에 데려갔습니다. 치료와 회복을 도와주고 소년이 고아라는 사실을 알고는 아이를 자신의 아들로 입양했습니다. 그런데 몇달이 지난 어느 날 밤, 아들이 이불을 뒤집어쓰고는 흐느끼며 우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아이는 눈물젖은 목소리로 말합니다.

“걱정이 돼요. 갑자기 두려운 마음이 들어요. 내일은 어떻게 살까요. 어디서 어떻게 먹을 것을 구할 수 있을지, 추운 겨울이 오면 따뜻한 옷은 구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매일 밤마다 안전하게 잘 수 있는 곳을 찾을 수 있을지 걱정하면서 살았어요.”

사랑많고 행복한 양부모의 품안에서 고아로 살아온 아이에게 갑자기 찾아온 두려움과 비슷한 염려를 우리가 하고 있다면 어떨까요.

불청객처럼 불현듯 찾아오는 두려움과 슬픔의 감정이 있습니다. 건강하게 잘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병이라도 생기면 어떡하나. 잘 지내는 자녀들에게 어느 날 걱정거리가 생긴다면 어쩌지. 잘 나가는 직장에서 갑자기 해고라도 당하면 뭘 먹고살지. 옷깃을 스치는 찬 바람처럼 순간 찾아와 심장이 떨리게 만듭니다.

만일 엄마에 품에 안긴 아이가 이런 걱정으로 몸서리치며 울고 있다면 엄마의 마음은 어떨까요. 하나님의 그런 마음을 성경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여인이 혹 자식을 잊는 일이 있다할지라도 나는 너희를 잊지 않을 것이라(이사야49:15).”

성경은 이렇게 전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의롭다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로마서8:31-39).”

종교개혁자 칼빈은 우리가 믿을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 가지 의를 주시는데, 첫째는 모든 죄로부터 우리를 의롭다 인정해주시는 것과, 둘째는 믿음을 가진 신자라 할지라도 아직 타락한 죄성이 남아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가 행하는 작은 믿음의 행위를 의롭다 인정해주시고 그것을 근거로 성도의 거룩성을 인정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안전한 곳이지만 마음은 두렵고, 행복한 시간 중에 불행한 감정에 사로잡히고, 불현 듯 심장이 떨릴 정도로 불안함이 찾아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사랑의 품에 있어도 본래 부패했던 우리의 죄성이 우리를 자유롭게 놔주지를 않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는 ‘그 사랑’을 기억하십시오. 지금 나에게 찾아오는, 아니 가슴 저 밑바닥에 똬리를 틀고 떠나지 않는 두려움과 슬픔의 감정들은 허상입니다. 결코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죄와 지옥의 모든 저주들이 일어나 우리를 공격한다 할지라도 결코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