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11-12


문밖에 온 손님처럼 새봄을 맞으려는 데 겨울이 그냥 가기 서운한 지 70년만의 폭설을 내렸습니다. 하염없이 쏟아져 내리는 눈이 겨울 가지마다 흰 꽃을 피우니 “존귀한 자들의 몸이 눈보다 깨끗하다”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일본 기리시탄 탄압이 극에 달했던 시기를 배경으로 활동했던 한 선교사의 이야기 ‘침묵’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한 선교사가 포교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강한 의지로 믿음을 지키고자 했지만, 무자비한 고문과 함께 죽어가는 교우들을 살리기 위해 배교를 결정합니다. 배교의 증거로 사람들 앞에서 성화상을 밟을 때, 자신의 발에 아주 강한 통증을 느낍니다. 이 때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밟아라. 너의 아픔을 내가 안다. 나는 밟히기 위해 세상에 왔다. 밟아라. 너의 아픔을 나누어 주려 나는 십자가를 짊어졌다.”

이야기에는 아주 유약한 신자 키치지로가 등장합니다. 그는 체포되면 주저하지 않고 배교를 하고 성화상을 밟고 고통을 피해 달아나는 인물입니다. 어느 날 그는 선교사를 찾아와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는데, 그가 이번에는 순교를 선택합니다. 무참히 죽어가는 교우들 앞에서 선교사는 고통에 절규합니다. “하나님은 왜 침묵하십니까?” 그에게 예수님의 음성이 다시 들립니다. “나는 침묵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너희의 고통과 슬픔에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약한 것이 강한 것 보다 괴롭지 않았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희망의 신학자’로 불리는 몰트만은 포로수용소의 경험을 통해 말합니다.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은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일입니다. 극악무도한 인간성과 힘없는 고통 당하는 사람들에 대해 대답 없는 질문들만 쏟아집니다. 구원의 희망이 없었던 고통의 나날들… 그 때에 하나님은 내 곁을 떠나 계신 듯 했습니다. 그 때 나의 신앙의 열쇠는 예수님의 십자가였습니다.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인간 구원을 위해 철저히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던 예수님. 나 자신이 ‘하나님의 떠남’을 경험하며 떨고 있을 때 십자가의 예수님이 나의 삶에 들어오셨습니다. 그의 ‘함께 고난당하심’이 나로 하여금 희망을 갖게 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게 만들었습니다.‘

기도하기 위해 혼자 예배당에 들어올 때, 늘 가장 먼저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습니다. 오랜 기간 동안 무료하고 고통스러운 투병생활을 하시는 분들, 해결되지 않는 삶의 무거운 짐을 지고 계신 분들, 차라리 몸의 어디라도 다쳐서 싸매고 치료하여 나아지면 좋겠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고통의 시간을 단지 견디고만 있다면 우리의 마음 깊이 찾아오는 낙담을 어찌할 수 가 없습니다.

그럴 때는 기억하십시오. 천국의 기쁨은 고난 속에서 더욱 극명하고, 구원의 기쁨은 십자가에서 절정을 이루는 법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기쁨은 외적이며 일시적인 감정일 수 없습니다. ‘온 마음과 영혼과 힘을 다하여’ 체험하는 것입니다. 전적인 헌신이 아니고는 그 구도(求道)를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그런 기회가 온 것은 아닐까요.

겨울의 눈은 반드시 녹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시험은 결국 끝날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스스로 답할 겁니다.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숨겨져 있었다고 말이지요. 그 때에 발견하는 천국의 기쁨을 무엇으로 비교할 수 있을까요.

우리를 찾아온 고난에는 하나님의 기쁨이 신비처럼 숨어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딛고 서서 기독교는 매우 독특한 기쁨의 종교가 되었습니다. 골고다 뒤에서 부활의 태양이 떠오르고, 죽음을 밑거름으로 영원한 생명이 창조되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고통은 기쁨이 되고 죽음은 생명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