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46:1-11


인생을 살다 보면 좋은 일도 있고, 속상한 일도 있습니다. 행복에 겨워 감사가 절로 나오는 때가 있고 너무 힘들어 죽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좋을 때는 하나님이 가까이 계신 것 같은데 고생하고 힘들 때 하나님은 어디론 가 숨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성경에 욥의 이야기가 그렇습니다. 평소 의인처럼 경건히 살고자 노력했던 그에게 갑작스런 고난과 극심한 통증을 수반하는 병이 찾아 왔습니다. 그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해 불평을 쏟아 놓는 데, 주변 친구들도 할 말을 잃습니다. 인간으로서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만했기 때문이지요.

욥이 끝없는 불평을 늘어놓고 있을 때, 하나님이 그를 찾아 오십니다. 그리고 욥의 지혜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신비를 보여주시지요. 이후 욥은 신앙의 새로운 차원을 경험하게 됩니다.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입니다(욥40:4)”

교회 역사 속의 신앙인들로부터 우리는 이와 비슷한 경험을 만납니다. 어거스틴은 ‘참회록’에 “내가 주님을 만날 때까지는 내 마음에 안식이 없습니다”고 했습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글을 장황하게 써 내려가던 어느 날, 하나님의 신비를 깊이 경험하면서, “하나님을 표현하는 자신의 말들이 지푸라기처럼” 보였습니다. 이후 그는 하나님에 관한 글을 한 줄도 쓰기 어려운 때를 경험합니다. 그 마음을 우리는 ‘경외감’이라고 합니다.

며칠 전 친구로부터 소식을 받았습니다. 몇 년 전 위암으로 위 절제수술을 하고 치료하면서 기도 중에 있었는데 얼마전 진단에 췌장과 담낭에 암수치가 높게 나와서 정밀 검사를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매의 어려움과 생활고가 얼마나 심한 지 제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기도 요청 소식에 위로할 말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은 거듭거듭 덮치고 있는데 하나님은 왜 아무런 도움도 주질 않으시는 것일까. 의심이 먹구름처럼 밀려올 때 하나님의 말씀이 힘이 되면 좋겠습니다.

‘모든 성도의 기도는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계8:4)’ 반드시 올라갑니다. 하나님은 모든 형편을 자세히 아실 뿐만 아니라(사41:10) 최선의 응답, 최고의 선물을 주심은 분명한 성경의 약속입니다(눅11:13).

‘하니님이 침묵’하신다 생각이 들 때, 그것은 단지 내가 모르는 하나님의 신비일 뿐 공백이 아님을 믿어야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과 말할 수 없는 탄식과 긍휼로 가득한 신비의 충만입니다. 하늘의 군대가 동원되고 하늘의 능력과 권세가 나타날 겁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니라 하시더라(요11:4)”

뱃사람들은 폭풍우 속에서 육지를 찾는 비밀을 압니다. 어둠과 폭풍우 속에서는 파도에 눈길을 고정하지 말고 해안에 있는 등대 불빛에 시선을 맞추고 그것을 향해 전진합니다.

주기도문의 첫번째 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거기에 우리의 방향이 있습니다. “하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거룩, 하나님의 신비”를 믿어야합니다. 우리의 지혜가 이르지 못하는 곳에 우주보다 큰 하나님의 신비가 거대한 생명력으로 약동하고 있습니다.

우리 기도의 최종 응답은 천국입니다. 거기는 눈물도 죽음도, 슬픔도 고통도 없습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란 마치 엄마의 뱃속에서 아기가 세상 밖으로 나가기를 두려워하듯 우리가 천국보다 세상을 더 익숙해 하는 것 뿐이겠지요.

나는 거기서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들, 지금은 나의 딸이 되어 우리 옆에 와 있는 자부를 보고 싶습니다. 거기서는 내가 걱정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은혜로 평안하겠지요. 어릴 적 먼저 천국간 누이동생을, 큰아들로 효도하지 못해 늘 죄송하기만 했던 어머님을, 누님들을, 동생을, 거기서 보고 싶습니다. 거기서는 모두 편안하겠지요(살전4:13-14). 하나님의 침묵에 담긴 신비를 나는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