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4:17-25

위대한 스승이 있었습니다. 많은 제자들이 모여 가르침을 받는 중에 제자들에게 한 가지 불만이 생겼습니다. 스승께서는 제자들 중에 유독 바보같은 제자 하나에게 특별한 관심과 사랑을 쏟는 것이었습니다.

하루는 제자들이 모여 스승에게 그 불만을 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스승은 말했습니다. “내일 아침까지 모두 새를 한 마리씩 가지고 다시 모이거라.” 이틑날 스승은 제자들에게 과제를 주기를 “오늘 저녁까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그 새를 죽여 가지고 다시 모여라.”

제자들은 즉시 흩어져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은밀한 곳으로 가서 자기 새를 죽여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렇지만 저녁이 되어 어두워지는데 그 바보제자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교실은 바보제자를 비웃는 소리로 시끄러웠습니다.

아주 컴컴해져서야 바보제자는 돌아왔는데, 손에는 아직 새가 살아있었고, 그는 온통 몸이 땀으로 젖어 초췌해 보였습니다. 스승은 물었습니다. “너는 왜 아직 새를 죽이지 못하고 그냥 돌아왔느냐.” 그 제자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 스승님. 아침부터 저녁까지 제가 아는 모든 은밀한 곳에 가보았습니다. 마루 밑, 지하실, 다락, 동굴, 산골짜기 심지어는 최고 높은 산꼭대기까지 가보았지만 그 어디에도 신이 없는 곳은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바보제자의 그 말 한 마디에 주변은 쥐죽은듯 조용해졌습니다. 스승은 말했습니다. “이것이 내가 이 제자를 사랑하는 이유이다.”

올바른 신지식을 갖는다는 것은 단순히 정보를 습득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온 마음과 전 인격이 하나님에 대해 반응하는 것입니다. ‘엄마’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는 것과 ‘아기가 자기를 사랑하는 엄마를 신뢰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성경에서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할 때(요17:3) ‘영생’이라는 단어를 지식으로 습득하는 것과 그리스도를 알고 그 안에서 성도에게 허락된 영생의 은혜 가운데 산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구원의 확신을 갖는다는 것은 간단한 구원교리를 공부하고 결신카드를 작성하는 것과는 다른, 좀 더 깊은 단계의 영적 깨달음과 인격적인 신뢰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신지식은 무조건 믿는 맹신이 아니고, 배워서 동의하게 되는 지식도 아니며, 착하게 행동하는 것을 보니 알겠다는 도덕적 추측도 아닙니다. 칼빈은 이 세 가지를 경계하면서 인간의 마음은 본래 불신으로 향하는 고질적인 경향이 있으므로 ‘힘든 투쟁’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해 확신이 생긴다고 주장했습니다.

믿음은 지식이지만 단순한 지성적 이성적 기능으로 얻을 수 있는 일반적 세상 지식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지식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오감으로 파악하는 이해가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의 조명과 인치심의 결과로 얻는 영적 지식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성도의 확신은 매우 중요합니다. 성도의 확신은 경건의 출발이며 승리와 감사생활의 원천이고 낙심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줍니다(고전15:57-58).

오랜 시간 신앙생활을 했음에도 구원의 확신이 없고 용기와 당당함이 부족하다 생각이 들때는 세 가지를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셨다고 하는 것(요3:16,)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심에 조건을 요구하지 않으시는 것(딛3:5),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자 힘쓸 때 하나님은 반드시 임재하시며 ‘구하고 찾는 자’를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마7:7, 호6:3).

하나님의 말씀에 인격적인 응답을 하고자 힘쓰십시오. 어느 덧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신비를 경험하게 될 겁니다. 이것은 성도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삶의 모든 순간이 성도에게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말씀이 인격화되는 기회가 됩니다. ‘날마다 죽고, 아침마다 새로운’, 소망과 능력이 넘치는 신앙생활로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