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10:19-25
“존은 기독교인인데 활기 넘치는 교회를 통해 청소년기에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 후 소그룹 리더가 되었고, 제직이 되어 많은 교회봉사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교회에 다니지 않습니다. 언제부턴가 교회 생활이 무거운 짐처럼 느껴졌습니다. 항상 봉사하라는 요구가 끊이지 않았고, 그가 모임에 나타나지 않으면 문책하듯 말하는 교인들이 싫습니다. 설상가상 교인 간에 갈등이 깊어지자 그는 교회에 발길을 끊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 말합니다. 그러나 다시 교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구원받은 자의 삶을 살아가는 여정에서 ‘이를 격려하고 위로하는 교회’의 역할과 그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건 현대교회와 신자들에게 있어서 교회의 의미가 희석되고 약해지고 있는 것은 예의 주시하여야할 문제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 우리는 흔히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증거가 있습니까?’ 이는 당연한 질문이며 심지어는 예수님의 제자인 빌립도 같은 의문을 가졌습니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요 14:8)”. 빌립은 하나님을 보기 원했고 영적인 체험을 하고 영광이 드러나고 능력이 나타나기를 바랐습니다. 거기에 대해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환상으로 보거나 신비적 체험을 갖고 싶어합니다. 어떤 이들은 과학과 기술로 증명해보려고 하다가 잘 되지 않으면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쉽게 결론을 내리기도 합니다. 어떤 이들은 이성에 의한 신앙 변증이 사람들을 설득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이들은 교회가 표적을 보여 줘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이해를 초월하여 존재하시므로 믿어야할 대상일 뿐, 변증과 논리로 증명할 대상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시는 방법은 오직 하나 말씀입니다. 말씀이 언어로 기록된 것이 성경이며 성도의 삶에 있어서 ‘오직 성경’이라는 원칙이 그래서 존재합니다. 말씀은 예수님 자신이며(요1:1,12)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교회는 말씀을 선포하는 모임이며, 말씀의 공동체이고 선교의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삶으로 보여주는 공동체입니다
초대교회, 그들의 식사 시간은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성찬이었고, 그들이 모여 말씀과 삶을 나누는 것이 설교었으며, 그들이 모여 노래함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송이었습니다. 그들의 소유는 누구의 것이 아니라 모두의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예배였고,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이었습니다.
교회의 삶의 모습이 말씀의 현존이며 ‘하나님을 보여달라는 사람들의 요청’에 우리가 제시할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의 가장 중심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뒤늦게 생각해 내신 것이 아니고, 역사 속에서 우연히 생겨난 것도 아닙니다. 영원 전부터 잉태되어 역사를 통해 진행되어 왔고 영원한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의 목적은 그분의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주변의 교회와 교회의 지도자들이 아무리 부끄럽고 하찮아보인다 할지라도 ‘거룩한 교회’의 영광은 결코 사람들에 의해 망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곳으로 가는 순례의 과정에 순례자의 모습은 지칠 수 도 있고, 옷은 누더기처럼 낡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모습이 아무리 천하다 할지라도 천국과 거룩한 교회의 영광이 우리의 ‘낮은 몸’에 담겨 있고 ‘겉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울’ 것입니다(빌3:21, 고후4:17).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실 것입니다. 그날이 가까움을 볼 수록 더욱 모이기에 힘쓰고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낙심하지 않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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