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10:32-39

용병대장이요 노예상이었던 로드리고는 지금 수도원 골방에 스스로 갇혀 죽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는 아내와 동생의 부적절한 관계에 상처를 받고 결국 자식처럼 아끼고 사랑했던 어린 동생을 죽였습니다. 그 죄책감과 감정적 좌절을 극복하지 못해 죽음에 이르는 고뇌를 하고 있습니다.

전도자를 만나 그가 스스로 속죄 방법으로 택한 것은 그의 모든 무기 보따리를 끌고 높은 폭포 절벽을 올라 인디언 선교지까지 가는 것이었습니다. 성공 가능성이 희박하고 사고로 죽을 수 있는 무모한 일입니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천신만고 끝에 절벽 정상에 이르렀는데 인디언들을 만납니다. 그가 잔인하게 잡아 노예로 팔았던 사람들의 가족이었지요. 분노에 찬 그들은 목에 칼을 대고 피를 찾고자 합니다. 그는 저항할 힘도 마음도 없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 분노는 용서로 바뀌고 인디언은 그를 묶고 있던 속죄의 짐을 잘라 절벽 밑으로 던져 버립니다. 그 때 그는 인간 고뇌의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통곡으로 오열합니다. 그의 얼굴에는 인간의 좌절과 속죄의 기쁨이 함께 분출하듯 번민과 기쁨이 뒤섞인 눈물을 하염없이 쏟아냅니다. ‘미션’이라는 오래된 영화 속의 한 장면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어떻게 믿으면 되는 걸까요? 사영리를 공부하고 영접기도를 했으면 믿은 걸까요? 믿는다고 했으니 이제는 하나님이 책임져 주실 것이고 대충 잘못을 저지르고 죄를 지어도 괜찮은 겁니까? 아니면, 믿고자 하는데 아무런 변화가 없으니 확신도 생기지 않고 신앙이 무미건조한 것처럼 느껴집니까? 그렇다면 믿음의 의미를 다시 규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윤리적 전통을 중요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믿음은 곧 삶이었습니다. 믿음으로써 의인이 된 사람은 믿음으로써 살아야 했습니다. 그것은 의지적 결단이요 삶 자체였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은 양면성이 있습니다. 첫째는 단회적인 의미로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롬1:17). 아무런 조건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습니다.’ 둘째는 지속적인 의미입니다. 믿음으로 의인이 된 사람은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히1038). 그것은 도덕이 아니라 신앙입니다. 성도의 신앙이란 사회의 도덕과 법을 뛰어 넘어 하나님의 의와 경건을 추구하는 것입니다(마5:20).

기독교가 전하는 복음은 두 가지 형태를 갖습니다. 첫째는 인생의 방향을 하나님께로 바꾸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천국복음을 믿으라(마3:2, 막1:15)” 할 때 회개는 방향전환을 의미합니다. 둘째는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이 둘은 형태는 다르나 의미는 같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삶의 방향을 하나님께로 바꾸고 하나님께서 주인이 되는 삶을 살기로 결심하고 실제로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실제의 삶과 윤리의 중심이 바뀌지 않았다면, 믿음은 무미건조할 수밖에 없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실제의 변화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 성경을 읽어야 하고 영이신 하나님을 알기 위해 기도의 자리에 나가야합니다.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를 찾는다 하셨으니 공동체의 예배에 참여하여 교회공동체의 혈관이 되고 숨결이 되어 함께 숨쉬고 함께 박동해야 합니다.

교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실제의 삶에서 능력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공허합니다. 그것은 실제로 하나님을 아는 것도 아닙니다. 성도의 삶에 믿는 자의 특징이 없고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사고방식과 언어습관과 가치관에 머물러 있다면 진정한 의미의 그리스도인이라 말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용서하는 태도에서 용서받은 사람임이 확인되고 서로 사랑하는 모습에서 주님의 제자임이 드러납니다. 같은 이치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삶의 방향을 의지적으로 전환하고 그리스도가 주인 된 삶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는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