엡4:13-16
톨스토이의 명작 ‘안나 카레니나’에는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는 두 커플이 등장합니다. 안나와 브론스키, 그리고 레빈과 키티입니다.
귀부인 안나는 여행 중 기차역에서 우연히
마주친 젊은 장교 브론스키를 첫 눈에 사랑하게 되었고 불륜에 빠집니다. 사랑은 변화를 통해 인간을 성장시키기 마련인데 안나는 변해가는 사랑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욕심으로 얻은 사랑은 집착과 증오로 바뀌고 이는 삶에 대한 절망으로 이어져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성장이 없는 제자리 사랑, 처음 그 자리 기차역으로 돌아와 그녀는 죽음을 선택합니다.반면에 레빈과 키티 부부는 변하는 사랑과 함께 성장합니다. 출발부터 순탄치 않습니다. 레빈의 첫 청혼은 거절당하고 두번째 청혼을 키티는 받아들입니다. 그 이후에도 부부들의 일반적인 문제, 즉 차이, 갈등, 싸움, 사랑을 반복하면서 후회와 미련 속에서 결혼 생활을 이어갑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성장합니다. 사랑의 변화는 안나에게는 파국이 되었고 레빈에게는 성장의 안내자가 되었습니다.
레빈의 인생에서 성장의 계기는 어느 날 불현듯 찾아옵니다. 그는 영주였지만 농부들과 일체감을 갖고 싶어서 함께 풀베기를 하게 되는데, 귀족 신분의 그에게 험한 노동이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을 통해 그는 아주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일이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이내 몰입하게 되면서 어느 순간 일이 쉬워집니다. 일을 의식하고 잘하려고 애쓰면 갑자기 일이 어려워지고 자기를 잊고 일에 몰입하는 순간에는 일이 쉬워집니다. 느낌은 반시간 정도 일한 것 같은데 한 나절이 지났습니다. 낫 자체가 생명으로 가득 차 움직이듯 일이 저절로 정확하고 정교하게 되어갔습니다. 그 때에 레빈은 내면의 행복을 발견합니다. 몰입을 통한 자기 해방의 기쁨을 알게 된 겁니다. 그리고 연이어 그는 변화된 자신이 만나는 새로운 소통을 경험합니다.
점심시간이 되어 농부들 속에서 자리를 잡았을 때, 레빈은 신비로운 인간 사회의 융합과 유대감을 새롭게 느낍니다. 더 이상 신분과 귀천의 차이가 없습니다. 모두가 가족이고 형제입니다. 자아로부터 해방이 되고 나서 그는 세상과 진정한 교감을 하게 된 것이지요.
톨스토이가 ‘인생의 길’에서 “이승에서 인간이 얻는 최고의 행복은 사람들과의 융합과 일치이다”라고 말했던 것은 아마도 같은 뜻이 아닐까요. 욕심과 획득을 통해 얻은 행복은 일시적입니다. 그러나 성장과 소통으로부터 얻는 행복은 지속적입니다
그리스도인 안에 새생명이 있다면 성장은 필연적입니다. 멈추어 있다면 죽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의 성장은 어떻게 시작하며 어디를 향하는 것일까요?
성경은 ‘우리가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의 충만한 데까지 이른다’고 말씀합니다(엡4:13). ‘믿음과 하나됨과 충만함’ 다른 말로 ‘성장은 변화와 전환, 연합과 소통, 충만한 생명의 과정’입니다.
헬라어에서 ‘메타노니아’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는 ‘전체 인생에 영향을 미칠 만한 어떤 크고 강렬한 변화’를 의미합니다. 우리말로 ‘회개’이며, 하나님을 향한 인생의 큰 변화를 의미합니다.
바울은 예수님께 몰입함으로 그런 경험을 합니다. “그런 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는 것이라(갈2:20).” 찬송가 작가 크로스비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회개와 전환 이후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융합을 경험합니다. 거기에 생명의 충만이 있습니다. 그 성장의 절정에서 성도는 ‘최고의 영화로운 자신’을 만나게 됩니다. 이 땅에서 성장의 과정에 만나는 기쁨과 행복이란 단순히 욕구가 충족되었을 때 느끼는 행복과는 다릅니다. 그 이상의 어떤 것, 굳이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지복(至福)입니다. 더 없는 행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장에서 오는 보람과 기쁨은 지속적이며 나와 세상을 더 아름답게 하는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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