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0:25-37

 

“물에 빠진 사람 건져주면 보따리 내놓으라 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극한 곤경에 빠진 사람을 도와주면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보편적이지만 때로는 반대인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면 감사하지 않는 사람은 건지지 말아야 할까요? 감정적인 입장에서는 건져주고 싶지 않지만 윤리적인 면에서는 건져 주는 것이 맞습니다. 선행의 경계와 균형에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기독교인의 선행에 관한 유명한 교훈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 선행의 다섯 가지 경계와 균형점을 보여줍니다.

첫째, 신앙과 실천의 균형입니다.  이야기는 율법사의 ‘어떻게 영생을 얻습니까? 라는 교리적인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이웃을 몸과 같이 사랑하라’ 답하십니다.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 것은 천국행 도장 찍기가 아닙니다. 믿음은 회개와 전환에 대한 실천적인 결심이며 이는 성도의 윤리입니다. 신앙과 윤리는 분리되어서는 안됩니다.

둘째, 선행 대상을 규정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에 강도를 만나 거반 죽게 사람 비유로 제시합니다. 구제와 선행의 대상은 극한 곤경에 처한 사람, 나그네, 과부와 고아 등이 첫번째 우선순위입니다. 악한 의도를 가지고 악행을 일삼는 사람에까지 신자가 착할 필요는 없습니다.

셋째, 편견의 경계입니다. 이야기 중에 제사장과 레위인이 등장하고 이들은 불쌍한 이웃을 돌보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습니다. 그러나 당시 제사장들은 시체를 취급할 때의 규정(6:11, 2:13) 있었으므로, 그들의 행동이 정당하지도 않지만 정죄받을 일도 아니었습니다. 논쟁점은 사회문화적 편견과 윤리적 실천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것이겠지요.

넷째, 종족적 차이입니다. 문화 인류학은 지구상의 모든 종족이 각기 다른 ‘선’의 기준을 갖고 있다고 말합니다. 곳에서는 ‘선’이 다른 곳에서는 ‘악’이 있는데,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과 사마리아인 사이에는 그런 차이가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다섯째, 선행과 생활의 균형입니다. 사마리아인은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었지만 자기의 일을 위해 그곳을 떠납니다. 선행은 율법의 명령이지만 ‘풀타임 직업’은 아닙니다. 경계와 균형을 찾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좋은 사람 콤플렉스라는 말이 있습니다. 타인의 시선에 자신을 맞추기 때문에 항상 남의 시선, 남의 평가에 집중하다가, 정작 자신의 추구와 행복을 잊고 사는 경우를 말합니다.

교회에서는 ‘성도 콤플렉스’라고 가히 말할 있습니다. 신자는 성자가 아닌데 성자처럼 행동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인 기대입니다. 목회자나 교회 중직자들이 모두 앓고 있는 병증입니다. 선한 마음에서 도움을 주려고 하지만 언제 어떻게 거절해야 할지 난감합니다. 어느 선한 동기는 사라지고 부담만 남습니다. 나중에는 죄책감이 찾아옵니다.

헨리 클라우드는 No라고 말할 아는 그리스도인’에서 신자들에게 경계(Boundaries) 균형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효과적인 대인관계를 위해 No라고 말하는 법을 가르칩니다.

건강한 균형은 건강한 자아를 가지고 있을 가능합니다. 수준 높은 성경적 자존감을 가진 사람이 무리한 요구와 악한 유혹을 거절하는 힘을 갖습니다. 지속적으로 심한 학대를 받거나 압제를 경험한 사람들이 건강한 경계를 지키는데 어려움을 느낀다고 합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신자가 신앙생활에서 겪는 선행과 실천의 부담은 지속적인 압제 해당합니다. 만일에 내가 악한 사람의 악한 요청마저도 거절하지 못하고 있다면, 신앙적 자아의 건강성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자들이 사랑과 겸손을 베푸는데 너무 집중하다 보면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 가려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자신의 뜻을 구별하는 지혜를 갖고 올바른 판단을 하고 건강한 균형을 가져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