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9-14

 

1954 31 북태평양 한적한 곳에서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열핵융합 폭탄 실험이 있었습니다. 슈림프라는 별명의 폭탄은 과학자들의 예상을 빗나가 3배의 위력으로 폭발했습니다. 3 피트 상공의 정찰기가 핵연기에 휩싸였고, 낙진은 150Km 떨어진 곳의 어선을 덮쳐 치명적인 피폭을 입게 했으며 시간후 롱겔라프와 우티리크 환초로 떠내려가 무공해 섬을 죽음의 땅으로 만들었습니다. 1945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은 16킬로톤으로 도시 하나를 통째로 날리고 인구 10만명을 살상했는데, 슈림프는 1000배에 달하는 15메가톤으로 폭발했습니다. 원인은 과학자들이 슈림프의 주요 성분 하나인 리튬7 성질을 잘못 이해한 탓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인간에 대한 본질적인 역설이 담겨 있습니다. 인간은 천재적이면서 서툴고, 명석하면서도 어리석습니다. 1911 원자핵을 발견한지 불과 40 만에 메가톤급 핵무기를 개발했습니다. 달에 우주선을 보내고 유전자를 조작합니다. 가히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위업을 이루었지만 자만심과 무모함의 결과가 어떤 지는 알지 못합니다. 멈출 모르는 개발의 극치에서 돌이킬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책임을 모릅니다. 비합리적이며 무지합니다. 이것이 지성의 무지입니다.

지식은 가지가 있습니다. 알려진 지식, 알려진 무지, 그리고 모르는 무지입니다. 알아야 것을 안다면 감당할 있습니다.그러나 테러 집단의 공격은 알려진 무지입니다. 속수무책으로 당할 밖에 없습니다. 모른다는 사실 조차도 모르고 있는 경우는 완전한 정보의 공백입니다. 미래에 일어날 비극을 대비하지 못합니다.  

지진이 생기고 쯔나미가 발생하는 것을 우리는 없습니다. 알려지지 않은 무지의 상황은 언제나 벌어집니다. 수학에서는 이런 복잡성을 프랙털 fractal이라고 합니다. 숲이 수많은 나무로, 나무는 수많은 가지로, 가지는 수많은 나뭇잎으로, 나뭇잎은 그물같은 잎맥으로, 잎몸은 수많은 세포로 이루어집니다. 컴퓨터과학자들은 이처럼 끝없이 늘어나는 정보의 요구를 조합적 폭발 combinatorial explosion이라고 합니다. 폭발하는 정보 앞에서 우리가 가진 지식은 그저 가닥 실낱 같습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에 관한 논의는 어떨까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인간의 근원에 대해 안다고 열을 올리는 지식인들의 앎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요.

에덴부터 시작하여 인류는 끊임없이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거부의 역사를 이어 왔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라고 말할 (1:15) 하나님은 인간의 인지와 경험, 가해영역을 초월한다는 뜻입니다. 우주의 질료를 갖고 시공간 속에 갇혀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을 없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이 사람들이 있는 방법으로 찾아오신 계시가 바로 예수님입니다(1:12). ‘예수님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1:15). ‘감취어진 하나님 또한 나타나신 하나님 되신 겁니다(1:14).

성경은 하나님에 대한 세상의 가지 반응을 보여줍니다. 무지와 거부입니다(1:10-11). 그러나 의심의 황무지에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나옵니다(1:12). 성경은 그것을 은혜라고 말합니다. 그럴까요? 믿음은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됩니다. 그것이 우리의 믿음이며, 하나님의 구원하심 앞에 갖추는 겸손입니다.

하나님의 구원하심 앞에서 우리는 내가 믿었다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찾으셨다고 말해야 합니다. 잃은 양을 찾도록 찾는다 말을 어느 시인은 천국의 사냥꾼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거부하고 떠나는 나를, 끝까지 집요하게 포기하지 않으시고 죽기까지찾아오신 예수님의 마음으로부터 나의 구원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