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16-25

 

파란 고양이가 여행을 하는 , 벽이 길을 막고 있습니다. 벽이 묻습니다. ‘어디로 가는 거니?’ ‘ 모르겠어고양이의 답에 벽은 다시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만든 지도에 네가 가고 싶은 곳이 표시되어 있겠니? 너의 지도를 만들어 벽이 가로막고 있다 생각지 말고 벽위로 올라가 멀리 바라보고 네가 가고 싶은 곳의 지도를 만들어 보렴.’

전세계에 문자로 언어가 없는 부족은 있어도 종교가 없는 부족은 없습니다. 사람들이 본성적으로 갖고 있는 우주 보편적 질문 때문입니다. 신은 존재하는가. 인간은 무엇이며, 나는 누구인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질문은 보편적이지만 반응과 대답은 모든 개인이 다릅니다. 아니 각자가 자신만의 대답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겁니다.

우주 보편적인 질문에 대한 각자의 답변. 답은 가지로 갈립니다. 인간중심적 답이 있고 신중심적 답이 있습니다. 답은 인간이해로부터 출발하는 , 신중심의 인간이해는 사람이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졌다고 보고, 인본적 사고는 인간이 정신과 육체를 가졌다고 말하며, 유물론자들은 인간은 물질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사람은 육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리적으로 인간은 입자의 조합이고, 화학적으로는 원소들의 구성입니다. 생물학적으로 인간은 여성의 세포와 남성의 세포가 만나서 세포복제로 성장한 유기체입니다. 데이터학자들은 정보의 조합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뿐인가요? 지정의를 포함하는 마음은 어디 있으며 감성은 어디 있습니까. 자기가 낳은 자식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는 모성애는 어디 있으며 사랑과 희망은 어디에 위치하나요. 인생의 의미를 추구하는 마음은 어떻게 규정할 있을까요.

성경은 사람을 영혼을 가진 육체라고 규정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흙으로 빚어 만드시고 속에 생기를 불어 넣어 생령 되게 하셨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 말씀에는(창세기1:27-28) 사람이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존재라는 위대한 진리를 함의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단순히 물질 뿐이고, 정신도 물질과 뇌세포의 전기작용 내지는 화학작용 뿐이며, 인간은 화학 원소와 정보의 집합에 지나지 않는다면, 아마도 인류는 최고 진화체로서 호모 사피엔스이며 장차 나타날 호모 데우스(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신이 되려는 인간, 유기체와 인공지능 로봇의 한계가 불분명한 존재) 의해 멸종 당한다는 공상과학적 미래학자의 말이 타당할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문제는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는 인간 존재의 궁극적 질의와 답변은 거기서 간단히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느 무신론자의 말이 있지요. “나는 무신론이 사실이기를 원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지도 않지만 하나님이 없기를 바랍니다(토마스 네이글).” 무신론, 혹은 반신론은 이미 그들에게 다른 신앙이 되었습니다.

로마서 1:18-32 보면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두셨다하셨는데 영적 도덕적 타락의 모습은 참으로 처참합니다.

아놀드 토인비의 말이 생각납니다. “문명들이 살해되어지는 법은 없다. 주로 자멸한다.”

하나님이 계신 증거는 모든 만물 뿐만 아니라 영혼을 가진 육체로서 자신안에 이미 차고도 넘치지만(1:19-20), 모든 것을 굳이 부인하고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기를 간절하게 원하는무신론자. 그들이 말하는신으로부터의 자유 결국 인간의 비인간화와 도덕의 부재, 우수한 기계와 정보로 가득 사회, ‘영적으로는 자멸의 향하고 있음은 자명한 사실이지만 끝이 어떠할지의 예측은 아직 불가능합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사도 바울의 말은 우리의 가슴에 커다란 울림을 남깁니다. “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