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마태복음 1128절의 말씀은 안식의 약속으로서 우리에게 많은 위로를 줍니다. 그러면서도 이 말씀은 우리의 삶에 아주 중요한 많은 주제들을 함의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방향전환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안식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께로 인생의 방향을 바꾸어야합니다. 그러면 만나는 분이 있습니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그후 이런 회의가 생길 수 있습니다.

폭력 덩어리 같은 세상에서 우리의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견딜수 없는 인생의 짐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방향을 돌이켰을 때, 보란듯이 원수를 갚아주신다면 얼마나 속이 시원하겠습니까? 예를들어 잘못도 없이 억울한 일을 당하고 가슴만 치고 있었다면, 돈이 없어 무시당하고 가슴이 아프다면, 몸은 병이 들어 고통스럽고 희망이 없는 데 악한 조롱이 들려온다면, 절대적인 기회불균형에 절망한다면,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보란듯이 갚아 준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앞에 나타나신 분은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이라고 하니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왜 금은보화가 쏟아지는 흥부의 박은 아니고, 신데렐라 앞에 나타난 백마탄 왕자는 아닙니까? 고작 온유하고 겸손한, 고난받는 종입니까?

여기서 실망을 뛰어넘어 약속과 희망을 발견하려면 생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구테타가 일어나 왕조가 바뀌면 권력을 가진 왕이 바뀝니다. 폭력이라는 권력이 바뀐 것은 아닙니다. 과학과 기술, 자유주의 시장경제가 들어서면서 상대적으로 군주의 힘이 약해지면 권력은 폭력으로부터 자본과 기술로 옮겨갑니다. 권력의 질이 바뀌는 거지요.

마찬가지 이치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수고에 대해 생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고난의 종이 그 열쇠입니다.

사람들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모습으로 폭력으로 대변되는 권력을 얻기 위해 한 방향으로 질주하고 있습니다. 단언하건대 거기에는 끝이 없으며, 혹 거기에 이른다고 해도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폭력 시스템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번아웃됩니다. 잘못된 틀에서 너무나 열심히 살고 있는 거지요.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쉽을 얻으리니…’ 주님께서는 멍에를 벗겨주겠다고 약속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삶과 노동과 안식을 주님께 배우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인생의 짐을 지는 주님의 방법입니다. 마태복음 5장의 회중은 온유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주님은 몇가지 원칙을 제시하십니다.

축재는 천국의 원칙에 따라서 할 것이며(24), 폭력에 의거한 재물은 하나님과 양립할 수 없습니다(24). 노동과 수입은 합리적이고 적당한 정도에서 할 것이며(34), 불필요한 계획과(25) 미래에 대한 두려움때문에(34) 과도한 노동과 수입에 대한 집착에 자신을 내몰지 말라는 것입니다.

온유가 압제하는 폭력에 대한 눌린 자의 비폭력이라는 의미를 갖는다면 온유라는 단어는 단순히 온순하거나 유순한 성품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폭력적인 세상과 제도에 대한 항거의 의미를 가집니다.

세상은 자기가 가진 폭력을 자랑하는 곳입니다. 그것을 조금이라도 많이 가져보고자 사람들은 저마다 필요이상의 축재를 하기위해 스스로 번아웃되고 있습니다. 마치 타오르는 불을 향해 날아드는 나방들처럼 말이지요.

그 맹렬한 죄악의 불길 앞에 겸손한 종의 초대는 약해보이고, 그 항거의 음성은 잘 들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초대, 즉 과잉 축재를 위해 번아웃될 때까지 일하지 말고, 일함으로 행복하고 필요한 만큼만 일하여, 안식을 회복하라는 말씀이 그렇게 미련해보이나요? 아니면 세상의 재물과 권력을 헛된 망상이라고 말하는 온유와 겸손의 삶에서 웅장한 하나님 나라의 권력이 느껴지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