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6:18

 

외국인 선교를 하는 젊은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밤에는 대리운전을 하고 낮에는 사역을 합니다. 만삭이 되어 어려움에 처한 외국인 미혼모를 보호하고, 노동자의 딱한 사정에 주저없이 차를 팔아 돕기도 했습니다. 이야기를 들으며 눈물이 났습니다.

올바른 목사가 개중 있기도 하다는 생각에 반갑기도 하고 고맙기도 합니다. 요즘은 눈만 뜨면 낯뜨거운 교회 소식에 의기소침해졌나 봅니다. 그렇지만 역사를 돌아보면 언제 교회가 부끄럽지 않은 때가 있었을까요?

부끄러운 교회 이미 성경에도 예가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에는 이방인 중에도 없는 음행 있었습니다. “누가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합니다(고전5:1).

교부시대는 어땠을까요? 오죽하면 어거스틴은 교회는 창녀라고 꾸짖었을까요? 그는 창녀는 단순히 몸을 팔아 돈을 벌지만 중세교회의 성직자들은 영혼을 팔아 돈을 챙긴다 한탄했습니다.

종교인과 종교단체의 타락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언제나 모든 곳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종교적 진리 자체와 구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같은 이치에서  나는 거룩한 교회를 믿습니다라는 신앙고백을 논할 타락한 교회와 성직자들 구분함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공회 거룩한 교회 전체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 진리로서의 교회입니다. ‘ 세사람이라도 예수님께서 계신 회중 교회이며(18:20), 마지막 그의 신부로 들림 받을, 모든 성도가 이루는 하나의 교회입니다(19:7).

칼빈은 교회를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를 양육하는 어머니 비유했습니다. ‘거룩한 공교회 어머니의 자궁 같습니다. 수정란은 자궁에 착상하여 어머니와 몸이 됩니다. 나무 줄기에 붙어 있는 가지들처럼 모든 성도들은 몸으로 거룩한 사회 이룹니다.

거룩한 교회 대한 믿음은 결국 어머니의 품과 같은 영혼의 고향 대한 믿음이요 그에 대한 그리움입니다. 품에서 우리의 구원과 새생명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의 죄악상은 말로 형언할 없을 정도이지만, 하나님의 재창조와 거듭나게 하심으로 시작된 생명은 가장 순결하고 거룩한 영혼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 몸이 됩니다.

우리의 생애 경험하는 참으로 고귀하며 신비한 변화입니다. 아기가 엄마의 품을 찾듯, 죽음의 순간에 낳아 기르신 어머니의 품을 그리워하며 죽듯, 우리의 거듭난 본성은 거룩한 교회를향합니다.

나는 거룩한 교회를 믿습니다 말은 엄마를 찾는 아기의 울음 같은 본성의 외침이요 영혼의 옹알이입니다. 엄마에 대한 아기의 믿음은 절대적입니다. 아기는 엄마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습니다. 울고 보채면 엄마는 반드시 거기에 있음을 아기는 알고 있습니다. 교회는 우리의 존재와 본성이 자연히 아는 것이지, 억지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언제나 그리운 어머니의 품처럼, 나의 영혼의 고향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 그립습니다.

성경에 어느 한센병 환자의 기록이 기억납니다. 나병 판정이 내려진 , 그는 사랑하는 아내를 안을 없고, 사랑하는 딸의 부드러운 볼을 만질 없습니다. 몸이 썩기 시작하고, 흉측하게 일그러지는 얼굴과 함께 그의 인생도 무너져 버렸지요. 누구도 관심이 없고 아무도 만지지 않는 그의 삶을, 주님께서 찾아오십니다. ‘그를 만지며 말씀하시기를…’

거룩한 교회를 믿으십시오. 언젠가 하나님과 우리가 신비로운 융합을 이루는 , 구름같이 둘러싼 성도의 무리를 보게 것입니다. ‘거룩한 교회 아기가 달려가는 엄마의 품처럼 언제나 우리의 본향으로 존재합니다. 낙심하시 마세요. 하나님은 반드시 거기에 계십니다.

모든 눈물을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지나갔음이러라(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