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8:1-10
이집트의 ‘사자의 서’에 의하면 모든 사람은 두 번 죽는다고 합니다. 영혼이 육신을 떠날 때 처음으로 죽고, 그를 기억하는 마지막 사람이 죽을 때 다시 죽습니다. 우리는 평생 사는 동안 수많은 소중한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는 속도는 모든 사람들에게 같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부부 사이에서도 배우자가 죽고 짧은 시간에 잊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두고두고 기억하며 그리워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프랑스 영웅 나폴레옹의 죽음은 거의 두 달이 지나서야 영국과 프랑스에 전해졌습니다. 그 짧은 시간에 대제국을 호령하던 영웅은 사람들에게 빠르게 잊혀 졌고, 그는
‘사건이 아니라 소식일 뿐’이었다고 전합니다.
전도서 8장에는 왕과 지혜자가 대조를 이룹니다. 왕은 권력자이며 지혜자는 책사이거나 킹메이커입니다. 고대 왕의 권력은
절대적인 것이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힘으로서 권력은 왕과 함께 종말을 맞이하지만
그들이 남긴 존경과 신뢰는 국민들의 기억속에 오랫동안 남아 있게 됩니다.
지혜자의 박식함과 판단은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명예를 얻겠지만(1절) 왕이 우매한 결정을 하지 않도록 도울 의무가 있습니다(2절). 생각없이 행동하거나 악한 것을 일삼아서도 안됩니다(3절). 아무리 선한 의도라 하더라도 때와 판단의 선택에는 위중한 결과가 따르므로(9절) 지혜롭게 행동해야 할 것입니다(6절).
다른 한편 지혜자에게는 한계가 있습니다. 미래를 알 수 없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바람을 움직일 수도(자연), 죽음을 피하게 할 수도(인명),
전쟁을 모면할 수도(정세) 없으며, 더구나 악한 권세의 종말을 책임질 수도 없습니다(심판). 지혜자가 아무리 스스로 정의롭다 하더라도 악한 자의 술수에 해를 입을 수도 있습니다.
왕과 지혜자가 이루는 권력 구조는 처음에는 ‘국민을 위하여’라는 명분으로 연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명분은 권력이 진행되면서
자연스럽게 퇴색되고 결국에는 ‘악’만 남게 됩니다. 8절은 분명히 명시합니다. ‘악이 그의 주민들을 건져낼 수는 없느니라.’
권력을 옹립한 자들의 주변에서는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갖가지 형태의 악들이 파생적으로 발생하게 될 것입니다. 그 악은 결국 ‘그 주민을 구원하는’ 대의명분을 잃게 하며 핵심 세력을 수호하는 이기적인 집단 행동자로 바뀌게 할 것입니다.
본문 10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런
후에 내가 본 즉 악인들은 장사 지낸 바 되어 거룩한 곳을 떠나 그들이 그렇게 행한 성읍 안에서 잊어버린 바 되었으니 이것도 헛되도다’ 혹시 역사 속에 왕과 지혜자가 이룬 업적과 치세는 기록이 남을 수 있다 하더라도 ‘악한 정부’는 국민으로부터 존경과 신뢰를 얻을 수 없습니다. 결국 대의명분을 잃어버리고 ‘악에 빠진 권력’은 마치 좀비와 같이 존재하다가 사멸됩니다.
좀비들은 뇌도 없고 감정도 없이 살덩어리에 대한 욕구만으로 움직이는 죽은 자들을 의미합니다. 영화 속의 좀비는 자기가 살아 있다는 것을 모르는 죽은 자들입니다. 현실의
좀비는 자신이 이미 죽었다는 걸 모르는 산 자입니다. 정치는 명분이 있어야 하고 인생은 의미가 있어야
합니다. 명분과 정의를 잃어버린 인생은 부지불식간에, 말하는
시체처럼 의지력 없이, 생기 없이, 기계처럼 움직이다가 명멸합니다.
왕의 권력이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영원한 권력은 존재하지 않고, 지혜자의
깨달음이 아무리 심오하다 하더라도 신의 지혜에 이를 수는 없습니다(17절). 참된 지혜자는 그 지혜의 끝에서 무지를 발견합니다. 신의 지혜
앞에서 인간의 깨달음은 티끌처럼 날아가고 안개처럼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지혜의 양이 아니라 지혜의 질이
중요합니다. 존경과 신뢰를 얻지 못하고 헛된 권력과 함께 잊혀지는 이름들을 성경은 헛되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신비는 인간의 무지와 겸손을 말하며 또한 인생의 무한한 자유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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