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1:25
톨스토이의 단편에 ‘세 은자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주교는 여행 중에 ‘세 은자’들이 사는 섬을 방문했습니다. 주교는 그들을 만나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는지’ 물었습니다. 그런데 은자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고 답했습니다. 그들이 아는 유일한 기도는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뿐이라는 겁니다.
주교는 세 명의 은자에게 열심히 주기도문을 가르쳤습니다. 주교가 배를 타고 되돌아가고 있는데 무언가 반짝이는 것이 물위를 미끄러지듯 배로 다가옵니다. 세 명의 은자들이었습니다. 물위를 걸어온 은자들은 주교에게 주기도문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다시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이 때 주교는 은자들이 깊은 영적 생활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있음을 깨닫게 되고 자신의 섣부른 판단의 잘못을 깨닫습니다. “당신들의 기도는 주님께 닿아 있습니다. 내가 당신들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죄인들을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쌓는 것’과는 다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스마트폰을 모두 사용하지만 스마트폰에 담긴 최첨단 기술과 부품들을 다 알지 못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스마트폰으로 연결된 그 어느 누구와 의사소통이 일어나고 인격적인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에 책상이 있다’라는 표현 보다 ‘이 책상에서 내가 당신에게 편지를 썼어요’라는 사실이 더 중요한 이치와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신비와 기적을 믿는 것입니다. 사실상 성경의 모든 내용들이 신비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 중에서 ‘내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참으로 오묘한 신비이며 하나님께서 주신 큰 은혜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의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마지막 구절을 이렇게 끝냅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요한복음21:25)” 예수님과 함께 했던 삼 년의 신앙 경험이 과연 어떤 것이었길래 그는 이렇게 증거했을까요.
병자를 고치신 기적, 권세있는 말씀, 십자가와 부활, 그 모든 과정들을 통과하면서 경험했던 하나님의 영광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신비였던 것이지요. 그러므로 요한복음 스물 한 장을 기록한 끝에 ‘이 세상이라도 그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함’을 느끼는 겁니다.
이에 더하여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 신비를 나에게 은혜로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요한복음 20:31이 증거합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사도 요한이 남긴 것은 스물 한 장의 쪽 복음입니다. ‘세상이라도 두기에 부족한’ 방대한 신앙적 신비에 비하면 너무나 작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듣고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된다면 우리가 갖는 신앙적 신비는 얼마나 큰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하늘을 두루마리로 바다를 먹물로 삼아도’ 표현할 수 없는 것이지요.
‘내가 예수를 알게 되었다는 것’은 큰 신비이며 은혜입니다. 성경적 지식이 부족하다고 느끼거나 교회생활의 경험이 없다고, 혹은 과거의 죄로 인해 주눅들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신비가 내 삶에 이미 와 있음을 믿고 정진하십시오. 곧 그 ‘신성의 모든 충만’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골2:9). 나의 삶에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신비를 기대하십시오.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땅을 지나간 모든 성도’들이 저마다 각각 이 위대한 신앙의 신비를 간직하고 있음을 바라보십시오. 그것이 사도로부터 전승되고 있는 ‘신앙의 신비’입니다. 전승되고 있지만 독립적이며 한 사람의 신앙의 신비와 가치가 온 세상을 뛰어 넘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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