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9:1-10

우리 옛말에 개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생명의 소중함에 대한 지혜를 품고 있는 말이지요. 이와 비슷한 말씀이 전도서 9장에 있습니다.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는 내용입니다. 전도서 9장은 죽음의 보편성을 화제로 시작하는데 사실 그 내면적인 주제는 살아있는 시간의 소중함에 대한 말씀입니다.

죽음은 보편적입니다. 의인이나 악인, 선하고 깨끗한 자나 깨끗지 않은 자, 제사를 드리는 자나 드리지 않는 자가 다 죽음 앞에서는 동일합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죽음은 하나의 정해진 규칙입니다(9:27). 부정할 수 없는 죽음의 필연성 때문인지 일부의 사람들은 죽음의 문제를 회피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할 수 있으면 우회적인 표현을 쓰려고 하지요. 그러나 죽음은 무시한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외면한다고 해서 그저 지나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떤 인생을 살았다 하더라도 죽음은 여전히 거기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예외 없이 죽음을 마주할 것이며, 그 시간을 내가 선택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죽음 앞에서는 늘 숙명적인 태도와 감정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지혜자는 전도서 9장에서 죽음의 보편성에 대해 논하면서 죽음의 힘에 함몰되지 말라고 충고합니다.

헬라어에는 시간을 뜻하는 두 가지 단어가 있습니다. ‘크로노스카이로스입니다. 크로노스는 그저 흘러가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는 특별한 시간들이 있는데, 그것이 카이로스의 시간입니다.

그리스인들은 행동에 나서기 적합한 순간, 너무 늦지도 않고 너무 이르지도 않은 시기, 시간의 틈새 속으로 파고드는 기술을 카이로스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기회의 신 카이로스를 머리통에 풍성한 타래를 얹은 젊은이의 모습으로 상상했습니다. 카이로스가 옆에서 지나갈 때 우리는 그를 못 보거나, 보고서도 아무 것도 하지 않거나, 그의 머리 타래를 낚아채서 제압하거나 셋 중 하나입니다. 그의 머리를 낚아채려면 타이밍을 잘 잡아야 합니다.

행동력이 있는 사람 만이 직감에 힘입어 순간을 잡고 버틸 수 있습니다. 정확히 때를 알고 빠르게 결정을 내리는 사람과 물살에 휩쓸려 가는 지푸라기처럼 그냥 대세에 휩쓸리는 기회주의자는 엄연히 다릅니다.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지혜자가 묻는 질문은나의 인생에 지나쳐 버리지 말아야할 기회는 어떤 것인가?’하는 것이지요.

인생과 세월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할 중요한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그의 백성들의 삶은 모든 순간이 카이로스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주어진 광음을 의미 없이 보낼 때도 있습니다. 알면서도 때로는 힘에 부쳐서 때로는 게으름을 피우려고 중요한 때를 그저 흘러 보낼 경우도 있습니다. 모든 순간에 우리는 언제나 완벽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그의 모든 백성들의 시간이 카이로스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향해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고’ ‘그의 성도의 죽음을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이 어떠하든지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모든 순간들은 보석 같은 시간들입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순간에 가장 귀한 의미를 두는 기독교의 관점입니다.

살아있음은 전도서 1장에서 말하는입니다. 기회이며 타이밍입니다. 기도할 수 있을 때 기도하고 선교할 수 있을 때 선교하고 봉사할 수 있을 때 봉사하십시오. 그리고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하십시오. 모든 축복과 보석 같은 시간들을 죽음 이후 영생으로 미루어 두는 일은 바보 같은 일입니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전15:54)’ 죽음의 고민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죽게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살아가십시오. 당신의 순간들을 찬란하게 만드십시오. 그것이 영생에 잇대어 사는 신자의 복된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