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1:1-15
때로 우리 인생에서 너무 늦었다고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보고, 맛보고, 노래하고, 심취하지 못한 이 모든 경이로움들 앞에서 인생이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우리들에게 부드러운 눈길을 주고, 따뜻한 말을 해주었던 사람들이 우리가 관심을 주지 않고, 무심한 동안 떠나 버렸습니다. 헛것을 좇느라 사랑해주지 못하고 쓸데없이 마음 고생만 시킨 배우자, 잘 챙겨주지 못했는데 일찍 세상을 떠나버린 친구, 전에는 귀찮기만 했지만 지금은 한없이 그리운 어머니의 사랑, 기회를 잡아보려고 하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고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너무 늦은 것’일까요? 천재 소년이 도서관 사서가 되었다면 시대를 잘못 만난 걸까요? 시대를
만나지 못한 예술가, 작가, 발명가, 깡통이 된 자본가… 자기 시간대에 안착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시대정신을 잘 읽지 못했고, 돈키호테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생각은 공감을 얻지 못했고, 흐름을 타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너무 늦은 걸까요?’
전도서는 ‘기회를 놓쳤다고’ 실망하는
사람들에게 아직 시간이 남아 있음을 보여주는 복음입니다. 여기서 ‘남아
있음’이란 고난 후에 만날 미래의 영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고난과 함께’ 아니 ‘고난
속에’ 담겨 있는 ‘실존적인 의미’의 영광을 뜻합니다. 세상이 헛됨을 말할 때, 신자는 ‘헛됨’이라는
그릇에 담긴 의미를 말합니다. 세상이 고난을 말할 때, 믿음을
가진 자는 고난과 함께 있는 영광을 말하는 겁니다.
구원 역사는 성경이 담고 있는 웅대하고 포괄적인 주제입니다. 구원
역사를 받아들이게 되면 인생 전체에 일관성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 안에서 각 백성들을 자기
역할(소명)을 담당하는 자로 숭고한 가치를 갖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인간도 자신의 결정이 하나님의 웅대한 계획에 어떻게 공헌할 것인지 충분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전도서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계획을 모두 이해할 수 없음을 깨닫도록 합니다. 그러면서 신실한 자는 각각 하나님이 처리하실 큰 계획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키는 것으로(12:13) 자신이
‘파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일에 참여합니다. ‘인생의 헛됨’을 발견하고 좌절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헛됨의 복음’입니다.
전도자는 타락한 세상의 뒤틀린 현실을 설명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만,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아름다움에 눈을 감거나(3:11) 또는 인간관계, 먹는
것, 마시는 것, 일의 만족 등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것이 헛되게’ 보이고
시간이 너무 늦었다고 생각이 들어 절망감이 찾아올 때, 아직 거기에 변함없이 계시는 하나님을 찾고 그
안에 피난처를 구하라고 조언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며(3:14), 하나님은 자기 안에 피하는 자들에게 ‘반석’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
사람의 본분이 됩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경험하는 현상계는 이중적인 의미가 존재합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본래 인간에게 주셨던 분복이 있지만, 인간이 죄악으로 말미암아 상실하여 인식하지 못하고 단지
고통과 수고만 남아 있다고 생각이 들 때 세상의 모든 일들은 ‘헛됨’으로
종결됩니다. 바로 그 시점에 지혜자는 그 ‘헛됨’과 공존하고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직시하라고 촉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룸(롬8:28)’을 믿습니다. 그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을 것입니다. 그것이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길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는 믿음으로 신앙의 길을 걷습니다. 그 어떤 존재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신뢰를 갖고(롬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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