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6:24-28
코로나19 팬데믹 초기, 뉴욕 퀸즈에 있는 엘름허스트 병원의 545개 병상은 코로나19 환자로 가득 차고 여유분의 인공호흡기가 충분히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산소호흡기 보유량이 부족해지고, 필요로 하는 환자는 넘쳐나는 실정이 되자, 유럽의 몇몇 병원은 여러 질병을 동시에 가진 65세 이상의 환자들에게서 산소호흡기를 떼어 내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하면 X가 죽고 저렇게 하면 Y가 죽습니다. 누구를 살릴 것인가?’ 이런 추상적인 질문들이 2020년초 현실이 되었습니다. (후안 엔리케스, 무엇이 옳은가, 402).
언제나 그렇듯, 생명이 경각에 달린 환자가 넘쳐나는 극한의 환경에서
철학자의 멋진 달변이나 설교자의 메마른 외침은 크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 각자는 ‘자신의 삶의 존엄성에 대한 통찰’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이는 곧 삶의 행복과 연결되며, 소외로부터 오는 서운한 감정에서
자유를 줍니다.
기독교의 생명 존중 사상은 세 가지 면에서 강조됩니다. 첫째는 영혼
구원의 가치(마16:26), 둘째는 각 개인의 가치(눅12:6-7), 셋째는 생명 우선의 가치입니다(마5:25-26). 근본적으로 기독교의 생명존중은 영혼구원과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 생명의 의미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창1:27-28).
중년을 지난 사람들은 누구에게나 변화의 시기가 찾아옵니다. 여성에게는
폐경과 갱년기, 남성에게는 60세 환갑을 지나면서 오는 기력의
감퇴 시기입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 표현했고(시90:10), 홍수 이후 인간의 수명을 120년이라 말씀했습니다(창6:3).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죽음을 맞이하기 전 후반기 인생에서 또 다른 기회를 주십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는 시기’에는 거기에 맞는 열정적인 삶을 살아가지만, 그 이후에는 육체적으로 사회적으로 자유를 주십니다. 그 때부터는
일하는 모습과 살아가는 생각이 달라집니다. 이전에는 연애와 성취를 위해 일했다면 그 때부터는 인생 자체를
사랑하고 일을 즐기는 단계가 옵니다. 이런 단계에서 ‘초월’이 옵니다. 일을 해도 성과위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일하면서 기쁨을 찾고, 의미를 느낍니다. 삶의 진정한 존엄을 위해 출발하는 겁니다.
인생 후반기의 자유란 젊은 날의 충동과 나를 지배하는 야성적인 질풍노도의 방식에서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삶의 깨달음으로 들어가는 때가 됩니다. 혈연적 관계망에서도
벗어납니다. 부모님은 이미 돌아가셨고, 자식은 다 커서 자기
길을 가고, 인생의 책임으로부터 벗어나 비로소 세상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옵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세상과 만나는 통찰의 삶을 시작하게 되는 겁니다.
자유의 시기에 접어든 사람들에게 다시 청춘으로 돌아가고 싶은 지 물어보면 그렇게 하겠다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청춘과 열정이 남기는 여운에는 속박과 환멸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기 때문입니다. 전도서 지혜자의 말씀대로 ‘정욕이 그치는 때’가 오면 정욕과 열정의 삶의 방식을 멈춥니다. 일을 해도 자유로운
일, 섬기는 일을 하면 좋습니다. 그 때는 성공을 위해 최고
출력으로 달리는 열정의 시대가 아닙니다. 적당하게 일하고 필요에 따라 쉽니다.
정욕이 지나간 부부의 삶에는 우정이 찾아옵니다. 집착의 끈이 조금은
느슨해졌을 때 우리는 생명과 삶의 터전을 주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배움을 시작합니다. 배움의
과정에서 스승들이 생겨납니다. 이전에는 ‘스승과 제자’ 주종의 관계에서 배우고 가르쳤지만, 우정의 시기에는 ‘사우(師友), 스승으로
삼을 만한 벗’의 관계가 시작됩니다. 허물없이 지내는 친구로부터
배우고, 심지어는 아이들에게서도 배웁니다. 함께 대화하면서
배우고, 함께 놀면서 배웁니다. 이는 인간이 태어나서 맺을
수 있는 최고의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삶의 존엄성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허락’가운데 존재합니다. 그것은 놀라운 허락입니다. 깊이 빠져 들었던 세상 사랑, 열정이 재가 되어 식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 인생의 존엄으로 달려가는 자유를 얻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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