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0:25-37
기독교 사상가 프란시스 쉐퍼는 10년 목회와 5년 선교사역후 1951년 인생에서 매우 어려운 시기를 맞습니다. 분주하기만 했던 기독교 사역자의 삶의 절벽에서 그는 ‘영적인 실재,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깊은 확신’이 메말라 있음을 발견합니다. ‘만일에 이것이 분명치 않다면 미국으로 돌아가 다른 일을 할 것이라’ 결심하고 그는 매우 궁극적인 것들에 대해 다시 묻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깊은 통찰 속에 스스로 묻습니다. ‘주님, 스스로를 정통이라고 부르는 저 많은 것들 가운데 도대체 어디에 영적인 실재가 있습니까?’ ‘진정한 영적 실재를 지니지 못한 죽은 꼴사나운 정통주의는 기독교 이하의 것으로 거부되어야 한다’고 반성하면서 그는 깊은 묵상 가운데 단순하지만 심오한 어떤 것을 점차 발견하게 됩니다. 그 이후 그는 자신의 삶 속에서 매순간 임재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비로소 알게 되었고 그 묵상은 훗날 ‘참된 영성’이라는 책으로 발간되었습니다. ‘영적 실재’는 비록 빈약하기는 하지만 경험되어야 한다고 그는 생각합니다. 비록 하늘 나라에 가서는 그것이 얼마나 빈약한 것인지 비로소 알게 되더라도 이 삶의 현장에서 성령님의 임재하심과
나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열매를 맺으시는 그 어떤 실재가 분명히 있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러한 궁극적인 질문은 우리의 관심사를 행위에서 존재로 옮겨 줍니다. 행위는
성공을 낳지만, 존재는 열매를 맺습니다. 삶의 커다란 역설입니다. 우리는 과업에 신경을 쓰지만, 사람들은 우리가 어떤 인격이었는지를
기억합니다.
예수님께서 살아 생전에는 제자들 ‘가운데’ 계셨지만, 부활 승천후에는 성령의 임재 가운데 예수님은 제자들 ‘안에’ 계셨습니다. 예수님
살아 생전에는 제자들에게 보여지고 만져지는 존재였지만(요일1:1), 성령께서
오신 이후 제자들은 ‘아버지 안에’ 거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영적 충만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주님과 함께
있던 그들은 이제 그리스도인, 즉 작은 그리스도가 되었습니다. 말씀으로
그리스도를 전했던 제자들은 이제 삶으로 주님을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누가복음 10장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가 품고 있는 복음은 무엇입니까?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종종 선한 사마리아인의 베풂에 집중합니다. 그러나
‘자비와 베풂’이 영생의 조건이 된다면 그것은 올바른 복음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에서는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된 사람’의 상태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희망이 없는 그를 구해서 모든 비용을 다 지불하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모습은 인간을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모델이며, 여기서 ‘너희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는 주님의 교훈은 말씀을 실천하며 섬기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방식을 의미합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대표하는 교리와 전통에, 사마리아인이 표현하는 윤리와
실천 그 어디에도 ‘영적 실재’는 부재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전통과 실천은 사랑에서 융합되고 녹아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하나님의 인격 속에서 하나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넓은 품에서 인간의 변론은 의미가 없고 알량한 실천 또한 설 자리가 없습니다. 아버지의 크신 품에 쓰러지는 탕자처럼, 하나님의 충만하신 임재 속에서
인간은 진정한 자유를 얻어 날아오르는 기쁨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거기로부터 ‘남들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로 구원을 입은 바, 그 은혜 앞에 감사함이 아니라면 애초에 이웃을 사랑함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지성적 변론으로만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나에게 영적 실재로, 사랑으로 배어 나와야 합니다. ‘모든 것을 다 바쳐 사랑함’은 ‘소망 없이 버려진 자’의
마음에서 출발합니다. 그 수혜자가 아니라면 행위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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