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5:51-58

우주의 삼라만상은 끊임없이 변해가는 이치를 갖고 있습니다. 식물은 성장하고 구름의 모양은 바람 따라 바뀌며 세월의 흐름에 강산이 변하고 순간의 변화에 환경이 바뀝니다. 그러나 그 본질은 불변합니다. 사람이 태어나 자라고 식물이 성장하더라도 사람은 그대로 사람이요 나무는 그대로 나무입니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고 구름의 모양이 바뀌더라도 공기는 그대로 공기이며 구름은 그대로 구름입니다.

문장을 구성하는 동사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어떤 대상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동작동사이고, 다른 하나는 주체 스스로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서히 다른 상태로 진입하는 상태동사입니다.

예를 들어, ‘나는 차를 타고 서울에 간다고 하면 이는 동작동사입니다. 나라는 주체가 차를 타고 서울이라는 목적지로 움직입니다. 만일에 나는 너를 사랑한다라고 한다면 이는 상태동사입니다. 내가 라는 객체에 관계하여 어떤 변화를 만들어낸다는 의미가 아니고 내가 마음을 다해 사랑한다는 나의 마음 상태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상태동사의 특징은 처음과 끝에 같은 본질을 유지한다는 것입니다. 아내와 저는 올해 39주년 결혼기념일을 지났습니다. 돌아보면 저는 아내 사랑하는 법을 잘 모르고 결혼을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결혼하고 아들 둘이 태어났는데 자녀를 사랑하는 법도 잘 몰랐고, 부모님을 섬기는 법도 잘 알지 못했습니다. 제가 가졌던 가장 기본적인 관계에서의 사랑은 참으로 서툴렀고 실낱같이 가늘었습니다. 그렇더라도 그것으로 부부생활을 했고 가정을 꾸리며 살았습니다. 부족했지만 그것이 사랑이었음은 분명했습니다.

내가 누구를 사랑한다고 한다면 그저 사랑하는 것이지 그 사랑에 완성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하는 순간 행복하며 사랑하는 순간 그 사랑은 그대로 완벽합니다. 왜곡된 욕망의 감정놀이가 아니라면 사랑은 언제나 숭고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부족할지라도 사랑 자체의 본질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변화 또한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여기에 변화의 복음이 담겨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51절과 52절의 변화하다라는 단어는 상태동사입니다. 그 변화의 극치는 부활이며, 그 시작은 우리의 거듭남입니다. 식물은 아주 조금씩 자라기 때문에 그 성장을 눈으로 감지하기는 어렵지만 정상적이고 건강한 식물은 날마다 지속적으로 성장하게 마련입니다. 신자의 경건이란 처음부터 미미하고 하잘것없습니다. 신자가 수행하는 거룩이란 타락한 상태의 도덕과 그리 다르지 않지만, 그것을 인정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에 근거하여 변화의 극치인 부활과 본질상 동일한 대우를 받습니다. 이것이 칼빈이 말했던 이중칭의의 의미입니다. 생명현상은 끊임없이 바뀌겠지만 동일 본질이 성장하고 성숙합니다. 겉사람은 낡아져서 흙으로 돌아가겠지만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집니다(고후4:16). 이것이 변화의 끝에서 만나는 우리 자신의 모습입니다.

변화는 최선의 노력을 다해서 이루는 어떤 성취가 아니라, 우리 인생의 어느 시점이든 거기가 우리의 최선이고 거기가 우리의 완성입니다. 시작과 끝과 같고, 시작이 곧 영광의 완성입니다. 우리는 두 가지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는 우리가 경험한 영역 안의 삶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의 심연에 존재하는 미지의 영역입니다. 그러나 이 둘은 변화의 삶이라는 관점에서 하나로 융합됩니다.

변화는 엉켜 있는 실타래를 나의 생각과 말 그리고 행동으로 하나씩 풀어내는 행위입니다. 변화는 타인에게 요구하는 폭력이 아니라 자신에게 부탁하는 정중한 초대이며, 그 변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섬세한 연습입니다.

칼릴 지브란은 인간의 상상과 실현 사이에는 공간이 있으며 그 공간을 건널 수 있는 건 간절한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스스로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고, 그것이 실현되어 가는 과정에서 행복을 느낍니다. 겉사람이 낡아지고 속사람이 새로워지는 변화의 과정에서 우리는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