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6:1-11
안식일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해 안식과 안식일을 구분하여 탐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면 안식은 실재이며 안식일은 모형과 같습니다. 세례는 우리가 가진 내적 믿음을 회중 앞에서 공인하는 예식입니다. 이럴 경우 신앙은 실재이며 세례는 외적 증명입니다. 하나님의 안식과 안식일 사이에는 이런 관계가 존재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안식일을 준수하는 의미는 하나님의 창조를 기억하고 거룩하게 기리는 것입니다(출20:8-11).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실천에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선민의 신앙이 표현됩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백성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안식일을
지킴으로 창조주가 세상의 주인이심을 증거했습니다. 그들에게 안식일 준수는 신앙을 삶으로 증거하는 강력한
수단이었습니다.
옛 성도들이 안식일에 쉬는 것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증거했듯, 예수님
시대의 제자들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생명을 구하는 것으로 성도의 표식을 찾았습니다(눅6:1-11). 누가복음 13장 10-21에는
안식일에 ‘열 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를 고치신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자를 고치신 예수님은 구원과 해방을
펼치셨고, 안식일에 병을 고친다고 분노한 회당장은 안식일의 속박을 말했습니다. 안식일의 회당에서 무엇이 보이고 무엇이 들립니까? 예수님은 열 여덟
해 동안이나 사탄에게 속박되어 있던 여인의 구원을 보았고, 회당장은 사탄의 속박에 율법의 굴레 한 짐을
더 얹어 가련한 여인을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오래전 출애굽시대로부터 예수님의 동시대인들에게 이르기까지 안식일 준수는 이교적 세상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주요 특징이요, 자기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임을 자신과 이웃들에게 나타내는 표시였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계와 사회에서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신의 신앙을 증거하는 표식이 필요합니다. 삶으로 증거되며, 성도들에게는 정체성을 제공하고, 나의 신앙적인 꾸밈이 강력히 나의 내면의 신앙을 증거할 수 있는 단단한 바탕이 존재해야 합니다.
안식일은 행동의 율법입니다. 안식일에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따라 쉬는
것은 안식일의 행동이었습니다. 행동은 내면이 외부로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꾸밈은 바탕이 드러나고 밖으로 배어 나오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쉬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창조 원리와 능력을 보여주는 꾸밈이며 강력한 증거가 되었습니다.
여인을 고치신 주님은 18절에서 연이어 천국의 비유를 전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작은 씨앗 한 알이나 적은 양의 누룩과 같습니다. 작은
씨앗은 보잘것없고 하찮아 보이지만 큰 나무로 자라 하늘을 나는 온갖 새들이 쉬는 보금자리가 됩니다. 적은
양의 누룩은 너무 보잘것없어 이걸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싶은데, 머지않아 반죽 전체가 변합니다.
손 마른 사람의 치유, 열 여덟 해 동안 귀신들려 앓으며 조금도 펴보지
못한 여인의 치유, 사탄의 굴레가 깨뜨려진 작은 사건들이 모여 거대한 변화를 만들며 과정을 이어갑니다. 안식일은 신앙고백이 증거되는 날이지 중단되는 날이 아닙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나라가 힘차게 확장하는 날이지 축소되는 날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공동체는 안식일의 표면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새 이스라엘이 되어 하나님의 새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로 변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어두움에
눌려 있지 않고, 안식일과 함께 새롭게 밝아오는 ‘한 주간’을 경축하고 기뻐하며 생명에 참여함으로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그들은
보잘것없어 보이는 발걸음을 묵묵히 걸었습니다. 그러나 그 증거들이 씨앗이 되고 누룩이 되어 세상을 바꾸었습니다. 보잘것없어 보이는 안식일의 한 걸음에 하나님의 위대한 안식을 담고 신자들은 세상으로 전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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